장롱속에 오줌을 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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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석만(가명) 남 50세
술만 취하면 아무 곳에나 누워 자는 김 모 씨 9명의 형제중 맏아들로 이미 중학생 때부터 남녀 동생들을 돌보아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야 했던 그는 고등학교에 들어서면서부터 그 무거운 짐을 술로 달래는 버릇이 생기기 시작했고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사회에 일찍 발을 들여놓으면서부터 본격적인 술꾼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아래 동생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돌보아야 한다는 정신이 아무리 전날 저녁 만취가 되었어도 다음 날 아침에 몽롱한 정신으로라도 직장에는 빠지지 않았고 독학을 통하여 환경사 자격증을 따기도 한 성실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혼을 한 뒤로부터 알코올 중독 증상은 더욱 심화되고 정신 상태는 더욱 피폐하여져 가기만 했다.
특히 이제 어느 정도 자란 동생들이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꾸려가면서 알코올 중독 자가 된 형과 오빠를 무시하고 경멸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그를 더욱 분노하게 하고 때로는 허무감과 배신감마저 들어 술을 먹는 이유가 늘어만 가는 것이었다.
급기야 술을 먹고 간신히 집에 오는 날은 화장실을 구별하지 못하고 장롱 문을 열고 오줌을 싸거나 잠들어 있는 가족들 머리에 오줌을 싸는 일도 생겼고 쓰러져 잠이 들면 다음 날 자신이 한 행동을 기억하지 못하는 일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어느 겨울 날 술이 만취하여 보도 불럭에 누워 잠이 들었는데 눈이 오기 시작했고 눈이 소복이 내려 쓰러져 자는 김 씨를 덮어 지나가는 행인들이 죽은 사람인줄 알고 신고를 하는가 하면 어느 날 한밤중에는 지나가는 행인의 발길에 차여 발견되고 젊은 아내와 노모님이 리어카를 끌고 와 실고 집에 데려가는 일들도 자주 있었다.
술이 깨었을 때 김 씨는 점점 더 이상해져가는 자신을 보면서 술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지만 맏형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하고 동생들에게 무시와 천대를 받고 있다는 생각과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헤쳐갈 수 있는가에 대한 두려움과 술시만 되면 저절로 술집으로 향하는 자신의 모습을 제어할 수 없어 점점 더 술에 빠져 사는 것이었다.
그래도 조금 다행인 것은 20대에 입사해 그동안 성실하게 회사 일을 보아왔던 김 씨를 동료들이 상부의 눈을 속이고 해고를 당하지 않도록 감싸주었기 때문에 봉급을 받아 술을 먹고 집안에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전문가의 입장에서 보면 다행이라기 보단 오히려 알코올 중독 자가 되는 길을 보장 받은 일이 될 수 있었던 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좋은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회식자리나 일반 술자리나 잔치자리에서 언제나 마지막까지 앉아 여기 저기 술잔에 남아 있는 것까지 모두 거둬 마시던 김씨, 드디어 아내의 이혼 선언을 듣고 더욱 절망감에 빠지게 되고 모든 알코올 중독 자가 그렇듯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쪽 보다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더 술에만 의지하는 완전 폐인의 모습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언뜻 보기에는 강한 것 같은 김 씨의 아내였지만 매사에 알코올 중독 남편의 영향권 아래에서 어린 아들과 함께 눈물로 지새우기 일쑤였고 주위 사람의 권유로 보험회사에 다니게 된 그는 자신이 어느 정도 경제적 활동을 하기만 하면 이혼을 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리고 그 결심을 실행하기 전 마지막으로 기독교국제금주학교의 상담을 받아보기로 했던 것이다.
기독교국제금주학교에서 실시하는 4주 가족 교육을 받으면서 이혼을 하거나 별거를 하거나 방관을 하거나 어떤 경우에도 지금보다 더 행복해 질 수 없고 더 나은 삶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자신의 남편보다 훨씬 더 심했던 알코올 중중 환자들이 고쳐져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이혼하기 위해 쏟는 모든 힘을 알코올 중독 남편을 고쳐 사는데 쓰기만 한다면 소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인격, 또는 사고와 가치관등이 한 층 강화된 아내와 알코올 중독에 관한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금주학교의 실무자들과의 합력 사역을 통해서 알코올 중독 자 김 씨의 치유관리가 시작 되었고 그 열매는 맨 먼저 경기도 양평에 있는 은혜의 집(정신박약아 전문 복지관)봉사를 통해 맺히게 되었다.
아직도 술기운이 남아 있는 김 씨를 데리고 은혜의 집을 방문하여 목욕을 시키고 빨래를 하고 대 청소를 하면서 정신박약으로 고생하는 그들에게 김 씨가 얼마나 소중하고 필요한 존재인가를 스스로 깨닫게 했고 저렇게 모자란 사람들도 바르게 살려고 얼마나 몸부림치고 있는 가를 보여주므로 상당한 자존과 결단을 가지게 했던 것이다.
이후 김 씨는 기독교국제금주학교의 회원이 되어 정기교육을 마치고 10여 년 동안 단주를 하고 있으며 조그마한 회사의 사장으로 사업을 하고 있고 인천지역의 알코올 중독 자들을 발굴하고 그 가족들을 돕는 헌신적인 인천 지역사회의 리더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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